농장에서 띄우는 편지 43.

노각

통싯간 지붕 귀퉁이에 노란 편지봉투가 걸렸다.

부고
이곡리 김춘복씨 별세
발인 1978년 7월 1일. 오전 10시 뻘등
알리는 사람 장남 김제필 올림.

그랬다. 삼복더위가 막 기승을 부릴 쯤
백일홍은 열병을 앓았지만
춘복씨네 담장밑에 심어놓은 오이 몇 그루에는
희망처럼 오이가 주렁주렁 열렸다
뭍으로 유학보낸 제필이 잘 있다는 소식이
문주방 편지꽂지에 걸리고
중학을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큰 딸네미도
인편에 첫 월급봉투와 함께 기별을 보내왔다.

푸풋한 오이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월이 가면 배만 나오고 검은 버짐이 번졌다
때가 되면 오이도 늙어 간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죽어서 시호를 받았던 옛날은 아니지만
늙어서도 노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부고를 띄우던 날,
춘복씨네 지붕에는 만장처럼 베적삼이 휘날리고
마을 사람들은 상여집에서 상여를 맞췄다
 
 
출처 :주당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 박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