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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2830
30기념문집
ㆍ작성자 강방천
ㆍ작성일 2012-01-29 (일) 20:28
ㆍ장르 수필
ㆍ추천: 1  ㆍ조회: 1077      
ㆍIP: 211.xxx.233
강방천의 가치투자
강방천의 가치투자
 
1편 가치를 찾아라

1억으로 53억, 1억으로 1백40억을 벌었다 는 기사가 나면서부터 사람들은 나를 만나 면 그동안 얼마나 더 벌었는지 그것부터 궁금해한다. 또다시 내게 재산이 얼마나 불어났느냐고 묻는다면 1백56억원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일부 주식을 처분해 지난 7월14일에 문을 연 에셋플러스 투자 자문주식회사에 16억을 투자하고 1백40억 정도의 주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재산이 그렇게 많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묻는 사람도 많다. 정작 나는 돈이 얼마나 더 불어났는지 크게 관심이 없으며 엄청난 돈 때문에 기분이 들떠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나는 가치투자를 통해 장기간 보유하 기 때문에 돈이 쌓이는 일에 민감한 편이 아니다. 時勢(시세)차익을 노리고 주식을 사고 파는 사람과는 아무래도 느끼는 감정 이 다를 것이다.
다만 지난 7월14일 내가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투자자문주식회사를 차린 것 때문에 요즘 기분이 한껏 鼓舞(고무)되어 있고, 회 사에 들어설 때면 주식 투자로 돈을 벌었 다는 것이 새삼 실감나곤 한다. 현재 나의 직함은 전무이사이다. 에셋플러 스 투자자문회사 주식의 53%를 갖고 있지 만 나 자신이 리더십이나 조직 관리보다는 자산운용과 유가증권 분석업무에 더 어울 린다는 판단 아래 전무이사를 자청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다. 내가 1억원을 투자한 시기가 1997년 12월이었으니 1년 10개월 만에 1백 56배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비결은 단 하 나, 가치투자에 있다. 끊임없이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가장 가치 있는 곳에 투자한 것이 많은 수익을 낸 비결이 다. 내가 그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무슨 책 을 참고하느냐, 어떤 신문을 보느냐고 구 체적으로 파고드는 경우가 많은데 책이나 신문, 방송보도를 참고는 할지언정 결코 내 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 다.

가치를 찾는 기준은 상식이다. 세상 일은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저절로 해답이 보이 기 마련이다. 그래도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를 대비해서 내가 마련한 대답은 충분히 잠을 자라는 것이다. 가치 투자를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려면 정신이 맑아야 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면 피곤이 완전 히 풀릴 때까지 잠을 자는 게 중요하다. 가치투자, 가치를 찾는 법, 가치를 찾기 위 해 상식을 끌어들이는 과정, 이런 것은 설 명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내가 주식을 사기까지 어떤 생각을 하는가를 加減(가 감) 없이 얘기하는 것이 가치투자 방법을 쉽게 알리는 길이 될 것 같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증권회사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가끔 그때 증권회사에 들어 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 곤 한다. 1987년 6월, 나는 한국외국어대학 교 경영정보학과를 조기 졸업했다. 성적이 4.5만점에 4.43으로 전체수석이었다. 학교 의 추천으로 코리아제록스에 시험을 봤는 데 3차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추천받 은 회사가 증권회사였다. 1987년 6월 동방 증권(현 SK증권)에 취직이 되어 전산실에 서 근무했다. 하지만 전산실 업무가 적성 에 맞지 않아 2년 만에 그만두었다.

2편 주식회사는 미래의 생명체

1989년에 다시 취직한 곳이 쌍용증권(현 굿모닝 증권)이다. 경력사원으로 입사하여 서울 신설동 지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불공정 거래같은 편법에는 눈 돌리지 않고 전망 있는 기업을 찾아 철저 히 가치 투자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처음 에는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신규 상장종 목만 연구했다. 신규 상장종목은 장이 떨 어지면 다른 종목보다 더 떨어지는 위험부 담이 있는 반면, 제대로만 하면 엄청난 이 익을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학 때 남 들은 재미없다는 회계학에 유독 관심이 많 아 회계학 공부를 많이 했는데, 그것이 기 업 재무제표 분석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 다. 당시 나는 회계학을 다시 꼼꼼히 공부 하면서 주식들을 하나하나 살펴나가기 시 작했다.
나의 기업분석 방법은 첫째 기존 회사에서 제공하는 재무제표를 샅샅이 해석하는 것 이다. 둘째 재무제표는 불투명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익을 조작하는 粉飾(분식)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재무제 표를 수정해서 보면서 再(재)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기존 재무제표가 제공 하지 못하는 경영자의 자질, 조직의 인재 구성, 브랜드 이미지, 기술력 등을 따져봐 야 한다. 이러한 분석능력은 철저히 본인 의 능력에 달려 있는데 조금만 부지런하면 그런 것도 알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매장 을 찾아가 보고 납품업자들을 만나서 얘기 해보면 그 회사가 얼마나 좋은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넷째 진입의 장벽이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 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한국이동 통신(現 SK텔레콤)의 경우 독점사업이었 다. 코카콜라 같은 회사는 독특한 음료맛 을 따라 가기가 힘들다. 다른 회사가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진입하는 데 장벽이 있으 므로 이런 회사는 당연히 가치가 높다. 이 런 것이 바로 계량화할 수 없는 기업가치 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따져보는 것이 기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巨視的(거 시적)으로, 또 微視的(미시적)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 따져봐야 하는데 거시적인 요 인으로 환율, 금리, 인건비가 있고 미시적 인 요인으로는 회사, 제품가격, 원재료 가 격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예상되는 기대수익률이 얼마나 될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주식회사는 미래의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미래예측이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 적 동물이므로 주식은 인간들의 삶에서 해 답을 얻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삶 을 예측하면 주식투자의 해답이 나오기 마 련이다.

3편 주식은 타이밍의 예술

어떤 기업이 좋아질까. 당연히 효용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좋아진다. 1989 년도에 나는 쌍용투자증권 신설동 지점 경 력사원이었는데 당시 휴대폰은 큰 회사의 사장쯤 되어야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비싸서 살 수 없을 뿐 누구나 갖고 싶어하 는 물건이었다. 효용이 있다는 얘기이다. 한국이동통신(現 SK 텔레콤)의 기업내용 을 분석해본 결과 투자 가치가 있다는 판 단이 섰다. 상장되자마자 6만주를 매입했 는데 당시 주가는 2만1천원이었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의 매출실적은 그리 높지 않 아서인지 다른 직원들에게 추천했을 때 다 들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이동통신의 주식을 파는 시기는 내가 휴대폰을 살 때쯤으로 잡았다. 나 정도되 는 사람이 살 정도면 누구나 다 쓴다는 생 각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 1995년도에 한국이동통신 주가는 76만원으로 올랐다. 그때를 매도시기로 잡았다. 그 후에도 한국이동통신의 주가는 계속 올 라 최근 1백76만원을 기록했지만 適時(적 시)에 팔았다고 생각한다. 1만원짜리 주식 이 3만원으로 오르기는 쉬워도 75만원짜리 가 3배 오르기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 다.
1993년 7월 태영주를 사들일 때만 해도 태 영의 기업 내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子會社(자회사)인 서울방송이 적자였기 때문 이다. 당시 주식시장에서는 子회사 개념이 없었다. 어떤 기업의 자회사까지 일일이 분석해서 투자하기란 벅찬 일이다. 하지만 투자의 요소를 철저히 따지는 것은 투자자 의 몫이다. 子회사도 결국 투자라는 생각 이 들었다. 당시 신문에서 정부 주도하에 子회사의 경영실적까지 투명하게 공개하는 연결회계 제도를 도입할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것이 주식시장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되었다. 子회사까지 투명한 기 업분석을 공개하는 연결회계 제도가 도입 되면 태영이 주목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1993년에 태영의 子회사인 서울방송을 철 저히 분석한 결과 조만간 흑자전환이 가능 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바로 이듬해 서울 방송은 흑자로 돌아섰고 母회사인 태영 주 가는 2만원에서 7만6천원으로 올랐다. 27 만주를 매입해 총 2백억원의 수익을 얻은 것이다.

나는 쌍용증권에 다닐 때 4년 동안 수익률 이 업계 최고라는 명목으로 쌍용그룹 회장 상을 받아 온 가족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주식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사고 파는 시 기를 잘 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기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동부증권으로 자리를 옮긴 후 삼성전자와 포철 현대자동차 등 주로 우량주를 공략했 다. 7만원에 매입한 삼성전자 주가는 14만 원까지 올라갔다. 어떻게 주가가 오를 것 을 아는가? 대답은 역시 똑같다. 모든 해 답은 주변에서 나온다. 신문기사를 볼 때 단순하게 기사 그 자체로만 봐서는 안 된 다. 기사 내용을 소화하고 그 내용이 어떤 현상을 야기할 것인가를 추론해야 한다. 또 광고 하나를 보더라도 「혹시 주식시장 과 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하는 것을 따져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정보를 찾 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정보를 再(재)해석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재해석 능력을 기르려면 상식에 비추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광고를 보고 수익을 낸 예를 들어보자. 1995년 1월 동부증권 펀드매니저 시절 공 익광고협의회에서 제공하는 공익광고를 보 고 나는 무릎을 쳤다. 당시 경찰청과 도로 교통안전협회에서 「음주운전을 예방하 자」는 공익광고를 했는데, 그 광고를 통 해 음주운전이 줄 것이고 음주운전이 줄어 들면 보험회사의 지출이 줄어 수익이 좋아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가 나간 뒤 신문에는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차가 늘고 있으며, 손해보험사의 손해율도 하락 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다각도로 조 사를 해보니 기사 내용이 사실이었다. 1995년 1월부터 4월까지 제일화재 19만주 를 2만원에 사서 8월에 3만6천원에 팔았 다. 쌍용화재는 13만주를 1만2천원에 사서 2만8천원, 신동아화재 7만주를 1만8천에 사서 3만1천에 팔았다. 1995년에 3개 회사 의 주식을 사서 평균 두 배 이상의 수익을 낸 것이다.

세 군데 보험주를 팔아 삼성화재주 4만주 를 21만원에 매입했다. 1995년 12월에 매 도할 때 삼성화재주는 43만원이었다. 또한 보험주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1995년 8월, 47만원인 한국이동통신주 3만주를 샀 다. 1995년 10월부터 이동통신이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방식인 CDMA (코드분할다중방식)로 변환된다는 보도가 나왔던 것이다. 디지털은 기존의 아날로그 보다 10~20배의 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어 당연히 株價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었다.



4편 생활 주변을 살펴라

보험주로 벌어들인 수익을 갖고 매입한 또 하나의 종목이 바로 삼천리 주식이다. 삼 천리 주식은 생활 주변에서 가치를 찾아서 수익을 낸 경우이다. 그 즈음 나는 도시가 스가 설치되지 않은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도시가스를 설치하려면 가입자가 설치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몇십 만원 정 도 되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돈이 어디 로 가는가 조사해봤더니 도시가스 회사로 고스란히 귀속되었다. 재무제표를 살펴봐 도 수익으로 잡혀 있지 않았고 손익계산서 에도 이 돈이 나와 있지 않았다. 대신 대 차대조표의 자본잉여금으로 직접 計上(계 상)되어 손익에 반영되지 않으면서 기업가 치가 증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주의 이 익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삼천리는 도시가스와 함께 연탄도 취급했 는데 연탄 사업자는 국가에서 국고보조금 을 주게 되어 있다. 그 돈도 주주의 몫으 로 귀속되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3만6 천원에 17만주를 샀다. 두 종류의 주식을 사놓고 동부증권을 그만두었는데 한국이동 통신은 잘 알다시피 1백75만원까지 올라갔 고 삼천리는 8만원까지 올랐다. 회사에서 어느 시점에 매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득을 보았을 것이다. 보험주와 한국이동통신주, 삼천리주의 경 우 아주 간단한 생각에서 출발해 큰 수익 을 남긴 경우이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지 나치지 말고 가치를 찾고 再(재)해석하는 버릇을 들이는 것, 그게 바로 주식투자의 성공 비결이다.
나는 증권회사에 다닐 때 회사의 자산운용 을 담당했는데 일반 투자자들에게 투자 자 문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하겠다는 꿈을 안고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함께 일하던 동료 셋과 뜻을 같이 했으나 투자자문회사 를 차리려면 10억원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다. 우리 넷은 투자자문회사 대신 이강파이낸 셜서비스라는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기업 컨설팅과 금융컨설팅을 담당하는 회사였 다.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주식에 투자한 것은 딱 한 번이다. 1995년 11월 대성자원 주 2천주를 2만3백원에 샀는데 1996년 5월 에 12만7천원까지 올랐을 때 팔았다. 대성 자원 주식은 이후 19만원까지 올랐는데, 나는 원래 8만원대에 팔려고 작정했기 때 문에 큰 아쉬움은 없었다. 그때 얻은 수익 으로 아파트 잔금을 치를 수 있었다. 그 후로는 기업컨설팅을 하면서 외부에서 맡 기는 돈을 투자하느라 시간이 없어 내 개 인 투자는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가 가진 돈이 없었다.

왜 이름도 생소한 대성자원을 선택했는가? 대성자원은 時價(시가) 총액이 54억원에 불과하지만 대단한 우량회사였다. 대성자 원은 현금을 80억원 보유하고 있었고 대구 도시가스와 대성산소라는 우량기업을 子회 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석회석광산 을 갖고 있었고 탄광지역에 5백만 평의 땅 을 갖고 있었다. 또 영업이익이 개선되고 있는 추세였다

수급 불균형과 과도한 투자

나는 대성자원의 이러한 우량성을 보고 투자했는데 엉뚱한 이유에서 주가가 상승했다. 탄광지역 카지노 사업자 선정 문제가 나오자 그쪽에 땅을 많이 갖고 있는 대성자원의 주가가 급등한 것이다. 조금 빨리 주가가 오르긴 했지만 그러한 건수가 없었어도 대성자원은 주가가 충분히 오를 수 있는 회사였다. 대성자원은 그후 대성산업에 흡수 합병되었다.

내게 실패한 경험은 없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펀드매니저 시절부터 나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투자자문을 구하곤 했는데 내가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대성 자원주식을 매입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매입한 주식이 20만주에 이르는데 8만원에서 판 사람도 있지만 18만원까지 기다렸다가 매도한 사람들도 있어 모두들 큰 이득을 봤다.

나는 그들에게 대성자원 주식을 매도한 금액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사라고 권했다. 장기적으로 삼성전자 주를 보유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95년 9월에 17만6천원까지 올라갔던 삼성전자 주가가 서서히 하락하고 있었다. 다시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14만원에 샀다가 2만원 손해보고 12만원에 팔기도 했고, 11만원에 샀다가 7만원에 팔아 손해본 적도 있다. 2만원짜리 대성자원 주식이 올라 삼성전자 주식을 산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손해가 아니지만 어쨌든 삼성전자 주식으로 인해 손해를 본 셈이다.

1996년도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의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정보통신 관련 주식의 전망을 밝게 보고 삼성전자 주식을 샀던 것인데 반도체가 호경기에서 불황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1996년 6월 7만6천원에서 삼성전자 주식을 모두 매도했다.

왜 반도체가 인기인지 묻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앞으로는 디지털의 시대이다. 0과 1의 조합을 통해 모든 게 계산되고 처리되고 디스플레이되는 디지털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가 명령을 내리면 실질적인 계산은 반도체가 계산하고 기억한다. 정보화와 통신혁명은 디지털과 맞물려 있으며 결국 반도체가 혁명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도에 반도체 가격이 폭락한 것은 需給(수급) 불균형에서 비롯된 문제일 뿐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또 한 번의 실패는 1997년 3월에 매입한 한진주에서 발생했다. 2년 전부터 宅配산업을 눈여겨보다가 전망이 좋다는 판단이 서서 1997년 3월에서 5월까지 1만4천원하는 한진주를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7월에 2만 3천원까지 올라갔으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팔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1997년 11월에 3천8백원까지 떨어졌다. 결국 1997년 12월, 9천원대에서 팔도록 권유했다. 한진은 당시 택배사업 과도한 투자를 한 상태인데 갑자기 외환위기가 오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한국엔 백만장자가 너무 많다

대성자원주를 팔아 집을 마련하긴 했지만 나는 원래 집을 사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1996년에 주택을 구입한 것은 아내가 집은 꼭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산 것이다. 내가 집을 사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나라 집 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과 전세로 사나 집을 갖고 있으나 효용가치는 똑같은데 비싼 돈을 주고 집을 사는 것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억짜리 집을 月貰(월세)로 환산하면 월 4백만원짜리 집이라는 결론이다. 하루에 13만3천원을 깔고 자는 셈이다. 당시 특급호텔의 하룻밤 숙박료가 9만원인데 많은 사람들이 매일 특급호텔보다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가격은 효용에 비례해야 하는데 똑같은 효용을 누리면서 전세보다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혹시 집값이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투기심리와 함께 내 집은 있어야 한다는 舊(구)시대적 발상이 집값의 거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당시 아파트 가격과 전세가격은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동산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도 집값에 거품이 들어 있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반드시 거품이 걷힐 것으로 보인다.

나는 석사도 아니고 더구나 외국유학을 한 적도 없다. 대단한 실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며, 생각을 많이 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1992년부터 나는 우리 나라에 백만장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환율이 8백50원 정도였는데 주변에 8억5천만원을 가진 부자가 너무 많았다. 3억짜리 아파트 한 채, 예금 5천만원~1억, 월소득 2백만원(이자율로 따져 수익가치 2억)이면 백만장자 대열에 끼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백만장자라면 엄청난 부자이다. 미국 국민소득의 4분의 1도 안되면서 백만장자가 미국보다 더 많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재산을 달러로 환산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특히 부동산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예금과 수입도 환율 변동에 따라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결국 「부동산 비중이 너무 크고 달러 환율이 너무 낮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백만장자가 너무 많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富(부)는 부동산이 주를 이루지만 미국의 경우 소득이 주를 이룬다. 한 마디로 거품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당시 나는 언젠가 한번쯤 교정작업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만장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천4백만원을 달러로 예금

이제 부동산에 대한 과도한 소유욕은 정보통신 혁명 앞에서 수그러들 것으로 보인다.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는 생활방식이 바뀌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많은 물건을 구입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교통이 편리하거나 백화점 가까이에 있는 집에서 살 필요가 없어진다. 인터넷 교육이 활성화되면 이미 무너지고 있는 8학군은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공기 좋고 한적한 교외에 살면서 삶의 질을 추구할 것이다. 도시 위주의 집값이 全 국토적으로 평준화되어야 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러한 판단에서 집을 사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외환위기가 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 값이 너무 비싸고 상대적으로 달러가 너무 싸다는 생각에서 집값이 떨어지고 달러가 강해지면서 환율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7년 4월, 내가 가지고 있던 예금 가운데 3천4백만원을 달러로 예금했다. 당시 환율은 8백45원 정도였다. 원화를 달러로 예금하면 찾을 때 달러로 내주지는 않지만 달러로 환산해서 원화를 내준다.

나는 항상 가격 변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격 변수가 불균형을 조정해주고 자원을 재분배해주기 때문이다. 임금이 높아지면 설비를 들여와서 고용을 줄이고, 임금이 낮아지면 직원채용을 늘리게 된다. 가격은 시장의 불균형을 배분해주는 중요한 변수이다.

달러는 중요한 가격변수이다. 달러의 변화로 말미암아 원화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외환위기를 통해서 똑똑히 목격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달러가 오르고 원화 가치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 초 1달러에 8백원대이던 원화가 1천3백40원으로 올랐다. 갖고 있던 예금을 찾으니 6천만원 가량이 되었다. 거기다가 내가 보유하고 있던 원화 예금 4천만원을 합쳐 내 수중에 1억원이 생겼다.



주가 떨어질 때 과감히 매도


나는 예금을 찾으면서 주식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가가 마구 떨어지는 시점이었지만 환율이 오르니 수출관련주가 좋을 것이고 금리가 높아지면 현금을 많이 보유한 기업의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1997년 12월 중순 내가 선택한 회사는 영원무역과 대덕산업이었다. 당시 영원무역주는 1만4천원, 대덕산업 주는 4만2천원이었다. 내가 갖고 있던 1억원과 신용거래 6천만 원을 합쳐 두 회사 주식 1억6천만원 어치를 샀다.

두 회사의 주식을 산 이유를 살펴보자. 영원무역은 스포츠웨어 專門업체로 전세계에 수출을 하고 있었는데 재무구조와 이익구조가 튼튼했다. 또 경영자의 성향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쓸데없는 데 투자를 하지 않는 회사였다. 대덕산업은 인쇄회로기판 생산업체로 초우량 기업이었는데 현금을 4백60억원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경영자는 그야말로 匠人(장인)정신을 갖고 오로지 한 길만 파서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된 사람이었다. IMF 초기 주식가격이 마구 떨어지기 시작할 때 나는 과감하게 두 회사의 주식을 샀다.

1998년 2월 초 영원무역을 3만3천2백원에, 대덕산업은 7만2천원에 팔았다. 당시 대부분의 주식 가격이 하락했지만 두 회사의 주가는 상승했다. 나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증권사에 6천만원을 갚고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내 수중에 3억원의 돈이 생긴 것이다.

1998년 2월 초, 우리나라는 IMF가 제시한 여러 가지 처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 처방을 보면서 나는 우리 경제가 위기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苦盡甘來(고진감래), IMF가 제시한 처방들은 한국 경제에 커다란 이득을 남길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펀드매니저 시절 나는 우리나라 소액주주들이 부담하는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주주인데 5~30%를 갖고 있는 대주주의 불합리한 투자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수많은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봤던 것이다. IMF가 이러한 위험을 제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호 지급보증을 없애는 것은 매우 잘된 일이었다. 만도기계는 우량기업이지만 대주주가 한라그룹에 지급보증을 서는 바람에 엉뚱하게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봤다. 상호지급보증만 없었다면 당연히 만도기계 소액주주들은 큰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삼성전자 소액주주들은 대주주의 개인적 취미 때문에 큰 피해를 봤다. 이건희 회장의 고집으로 삼성자동차를 설립하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IMF 이전의 주식시장에는 투자문화가 아니라 투기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IMF 이전에는 대주주인 회장은 이사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법적 소송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대신 권한은 무한대였다. 그야말로 잘못된 지배구조였다. IMF 이후 대주주도 반드시 이사 직함을 달아야 한다는 법이 생겼다. 그렇게 되면 대주주가 배당이익에 대해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장들의 대출비리가 드러나자 재산을 압류당하고 처벌을 받는 것도 달라진 관행이었다. 기업들이 거액의 돈을 빌려 무분별하게 투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社外(사외)이사 제도 도입을 보면서 대주주들이 마음대로 전횡을 휘두를 수 없어, 소액주주들이 위험에서 해방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투명하고 부도덕한 지배구조가 서서히 개선되고 있었다. 1998년 1월과 2월 나는 우리나라에 新(신)주권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주식투자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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