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시절, 소중한 생명들을 많이도 희생시켰다. 특히 혈액종양 환아 들을. 질환 자체뿐만 아니라 항암화학요법 부작용, 의료진의 실수 등등으로.

자식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부모는 정신이 없게 된다. 완치를 담보로 한 주변의 유혹들이 너무 많고, 치료과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방법을 몰라 어찌할 바를 모르기가 십상이다. 또한 장기간의 치료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당시에 아이들을 잃었던 부모들이 주축이 되고 의료진(혈액종양파트 전공의와 간호사)과 방송사(MBC 주철환 PD) 및 자원봉사단체(하날다래)가 도와서 국내 처음으로 '혈액종양 부모회'가 만들어졌다. 이후 각 대학병원마다 부모회가 결성되고 각각의 부모회가 연합해서 지금은 '전국 혈액종양 부모 연합회'가 되었다.

수년 전에 작고하신 '이항'교수님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의학도로서 의사로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증상을 통해서 진단에 이르는 가장 합리적인 접근방법을 제시해 주었고, 환자에 대한 의료인의 도리를 몸소 실천했으며, 제자들이 어려울 때 항상 방패막이가 되었다. 교수 인사문제로 재단을 대변하는 이항과장님과 동문을 대변하는 전공의 치프로서의 내가 상당기간 대립해왔던 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는 당시에 환아 들의 주치의로서 애들을 많이 희생시킨 죄로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매년 어린이날 잔치, 2박3일간의 여름캠프(양평군 유명산), 크리스마스 행사 등이 있는데, 지금까지 1박 코스로 여름캠프만 참석하고 있다. 이항과장님 후임으로 3년 선배님이 오셨는데 열성적이기는 하지만 그 공간을 채우지는 못한 것 같다. 지금의 대학병원 전체 사정을 보면 당시의 내 행동이 부끄럽게만 생각된다.

올해는 여름캠프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팔산우회의 청계산 등반과 옛골토성 에서의 동창회(7월 26일)가 있었던 날과 겹쳤기 때문이다. 매년 참석했던 것을 빠지기가 미안했지만 다음에 계속해서 참석하면 되고, 동창회에는 처음 데뷔하는 날이라서 동창들과의 만남이 많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부모회 어머니 회원들이 특히 나를 좋아한다. 인기 순위에서 1위였으니까. 처음에 여름캠프에 참석했을 때 집사람과 함께 갔었는데, 방안에 있던 어머니들이 맨발로 뛰어나와 반겨주는 것을 보고서 그 뒤로는 집사람이 참석하지 않는다. 여름캠프 때가 되면 ‘애인들 보러가서 좋겠수’라며 질투 아닌 질투를 하기도 한다.

어제는 연합회 공동회장으로 있는 부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경아세포종 4기(5년 생존율 20-30%)로 많은 고생 끝에 피난처로 보냈던 아이의 부모이다. 항상 행사 때가 되면 안부 겸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전화를 한다. 올해는 여름캠프에 참석을 못했으니 이번 성탄절에는 참석해야 할 것 같다.

양자로 들인 자식을 불치병으로 보내고 또다시 양자를 들인 부모, 집을 나간 어머니 때문에 더 힘들었던 투병과정에서도 아빠보다 더 의젓했던 아이, 의료진이 밤에 항암치료 할 때면 항상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서 함께 먹자고 했던 부모, 힘든 치료과정을 극복하고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숙녀가 되어있는 아이, 의료진의 실수로 일찍 떠나보냈던 아이들... 회상할 것들이 많아서인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철이 아저씨" 혈액종양부모회 어머니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다. 매년 듣지만 불시에 어제 또 들으니 느낌이 새롭다.

참고로 매스컴에서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주제로한 행사는 심장병 아이들을 위한 행사이다.